
엄마(Mutti)가 떠날 시간이 되었다. 독일 메르켈 총리는 16년간 총리로 재임하면서 네 명의 미국과 프랑스 대통령, 그리고 다섯 명의 영국 총리와 마주앉았다. 107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참석한 유럽연합(EU) 정상회담에서 각국 정상들은 기립 박수로 떠나는 메르켈을 축하했다. 임기 말 지지율은 처음보다 오히려 높은 82%에 달했다. 국민은 총리를 “엄마”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후임 정부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지만, 외교 차원에서 메르켈의 빈자리를 채우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독일 외교는 여러 차원에 걸쳐 있다. 무엇보다 독일은 EU의 실질적인 리더로서 유럽의 통합을 이끌어야 했고, 이는 국제사회에서 발언권을 가질 수 있는 전제조건이 되었다. 메르켈은 EU의 중심축인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를 상징하는 ‘엘리제 조약’을 57년 만에 ‘아헨 조약’으로 갱신하면서 마크롱 대통령과 다정한 조우를 보였다. 다른 한편으로 중·동유럽 국가들을 아우르고, 북유럽의 ‘검소한’ 부자 나라들과 남유럽의 재정위기를 조율해야 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NATO를 중심으로 한 미국과의 대서양 동맹을 유지하는 것도 독일의 역할이었다. 유럽 내 가장 많은 미군이 독일에 주둔하고 있고 독일은 유럽 내에서 NATO 운영비를 가장 많이 분담하는 나라다. 그러나 미·중 갈등하에서 중국과의 관계 설정 역시 핵심 영역이다. 미국과의 대표적인 가치 동맹국이기도 하면서, 제조업과 수출 대국으로서 중국 시장을 포기할 수 없었다. 메르켈은 재임 중 워싱턴을 14회, 중국을 11회 공식 방문했다. 시진핑 국가주석에게도 메르켈만큼 신뢰할 수 있는 외교 파트너는 드물었다. 시 주석은 최근 긴 화상회의에서 “오랜 친구”라 부르며 메르켈의 퇴임을 아쉬워했다.
러시아는 여전히 유럽 안보의 주된 안보 위협이고,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독일은 러시아 제재에 앞장섰다. 그러나 동시에 노드스트림 파이프라인을 통해 러시아 가스가 독일과 유럽에 공급됐고, 러시아는 독일의 기술과 자본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상호 의존’은 독일이 러시아를 다루고 변화시키는 방식이었다. 러시아어에 능통한 메르켈과 더 유창한 독일어를 구사하는 푸틴 간의 ‘비판적 대화’ 역시 양국 간의 견제와 협력을 동시에 가능하게 했다. 다자주의에 기반한 기후변화, 인권, 법치와 같은 글로벌 의제 역시 독일 외교의 큰 축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처럼 광범위한 독일 외교, 그리고 메르켈의 외교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독일이 먼저 내세운 슬로건은 눈에 크게 뜨이지 않는다.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에서 헬무트 콜의 통일 외교, 그리고 메르켈에 이르기까지 실용과 신중, 그리고 협상은 독일 외교의 기본 요소들이었다. 자국의 이익과 안정이 흔들린 적이 없으면서도, 언제나 말을 아끼고 신중했다. 가진 것보다 하나를 더 적게 보이는 게 독일 외교의 방식이기도 했다. “화해와 무역을 통한 변화”를 추구한 동방정책은 “무역과 참여를 통한 변화”로 이어졌다. 경제외교와 다자외교, 그리고 협상은 이러한 흐름 위에 놓여있었고, 결정적인 순간에 균형과 견제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독일 외교는 산적한 현안에 당면해 있다. 미국-영국-호주를 연결한 안보 파트너십 ‘오커스(AUKUS)’의 발족에 유럽이 발끈했고, 대서양 동맹에 대한 불만과 전략적 자율성 논의가 다시 불거지고 있다. 민주주의 국가로서 지켜야 할 선을 훌쩍 넘어버린 폴란드와 헝가리를 EU의 법치주의 규범에서 어떻게 다룰지도 고민이다. 인도·태평양 전략에의 참여와 더불어 유럽 내 대중국 강경기조가 확대되고 신임 총리와 외무장관 후보들도 가치규범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팬데믹으로 일시 완화된 이민 물결도 조만간 다시 거세질 전망이다. 그럼에도 “독일 외교가 변하지 않을 것에 돈을 걸어서 잃은 사람은 없다”는 우스갯소리는 여전히 들려온다,
독일과 한국은 다르다. 경제력에 있어서도, 정치적인 영향력에 있어서도 확연한 급의 차이가 존재한다. 2차대전 이후 안보를 아웃소싱한 독일은 전략적 안보 행위자가 아닌 경제 및 규범 강국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과의 동맹을 유지하고, 중국과의 경제관계를 유지하면서 주변국들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고, 다자주의와 글로벌 의제에 대응한다는 큰 틀에서 양국은 동일한 도전을 가진다. 이념에 휩쓸리지 않고 중심을 잡을 것, 말을 아끼고 신중할 것. 한국이 독일 외교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막연한 동경이 아니라 행동을 하는 방식이다. 역사에서 드라마를 만드는 것은 드라마적인 이벤트가 아니라 역사의 동력을 끌고 나가는 축적된 힘이다. 조용한 저력은 힘을 가져오고, 진정성 있는 노력은 감동을 가져온다. 그렇게 해서 축적된 시간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한 나라의 외교적 면모는 몇 발자국 떨어져서 보면 확연히 드러나게 마련이다. 전 세계적인 선동정치의 시대에 메르켈은 겸손과 품위를 자신의 묘비명으로 미리 정해놓은 듯한 지도자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