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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2.09.03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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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진경의 ‘호이, 채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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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1월 29일 베른에서 열린 계절근로 제도 반대 시위 현장. 피켓에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다’ 등의 문구가 쓰여 있다. [사진 스위스노동조합연맹]

 

한국의 합계 출산율(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이 0.81명이라는 통계청의 최근 발표 후 국내외에서 우려 섞인 반응이 쏟아졌다. 이번 세기말 한국 인구가 절반으로 줄 것이라는 분석부터, 이대로라면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사라질 것이라는 디스토피아적 전망도 있다.

 

이 와중에 저조한 출산율을 해결할 방안으로 등장한 게 ‘외국인 가사도우미’다. 필리핀·인도·베트남 등 동남아 국가 출신의 가사도우미 또는 베이비씨터를 자유롭게 고용할 수 있도록 법을 바꾸자는 주장이 나온 것은 처음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외국인 가사도우미에 대한 최저임금을 별도로 정하자’는 얘기까지 나왔다. 한국인 입주 씨터에게는 300만~400만원을 지불해야 하지만 외국인 씨터에 별도의 최저임금을 적용하면 그보다 훨씬 낮은 비용으로 고용할 수 있고, 따라서 한국 여성들이 육아 부담 없이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다는 논리다.

 

한 나라 안에서 동일한 노동을 하면서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별도의 최저임금을 적용하는 게 차별인지 아닌지는 일단 차치하자. 경직된 노동 시간, 가부장적 문화, 높은 집값 등 저조한 출산율의 여러 이유 중 왜 하필 ‘한국 여성의 커리어에 대한 욕망’이 주로 지목되는지에 대한 의문도 내려놓자. 누군가 돌봄 노동을 대체하기만 하면 저출산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는 얄팍한 시각도 덮어 두자.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별도의 최저임금이라는 괴이한 아이디어를 접하고 떠오른 것은, 내가 사는 스위스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비인간적으로 처우한 역사다.

 

다함께운동, 미국 흑인 민권운동에 비견

 

스위스가 현재의 기술 강국, 작지만 부유한 나라로 성장하기까지는 외국인 이민자들의 공이 컸다. 스위스 산악지대 케이블카 사업을 이끈 건 이탈리아 이민자의 아들인 프란츠 칼 가라벤타였다. 스위스 명품 시계 브랜드 IWC 창립자는 미국 출신의 엔지니어 플로렌틴 존스, 스와치 그룹을 설립한 건 레바논 이민자 니콜라스 하예크다. 스위스 식품 기업 네슬레는 독일에서 온 앙리 네슬레가 창립했다. 1833년 취리히에 처음 대학이 세워졌을 당시 교수의 절반 이상은 독일인이었다. 이른바 고급 인력 외에도 스위스 경제 구석구석을 외국인들이 떠받쳤다. 1910년 기준 스위스 철도 노동자의 81%가 이탈리아인이었다.

 

그런데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많은 외국인이 고향으로 돌아간다. 1900년에 12%였던 스위스 내 외국인 비율이 1941년에는 5%로 줄어든다. 스위스는 노동력 기근을 겪는다. 건설, 관광 산업이 한창 발전하는 시기에 일할 사람이 없었다. 문제 해결을 위해 스위스 정부가 내놓은 방안이라는 게 묘했다. 1931년 ‘외국 시민을 위한 연방법’ 하에 ‘계절근로(Saisonarbeit)’라는 항목을 만든다. 계절근로 비자를 받은 외국인은 1년에 최대 9개월까지만 스위스에서 일할 수 있고, 실업급여 등 사회보험 혜택이 제한되며, 계절근로를 하는 동안 작업장이나 고용주를 바꿀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가장 핵심적인 건 계절근로자가 가족을 스위스에 데려오지 못하도록 한 항목이다. 만약 부부가 둘 다 계절근로자라면 부부의 아이는 고향에 둔 채 스위스에서 일해야 했다. 계절근로 조건을 이렇게 정한 이유는 분명하다. 일할 사람은 필요하지만 그들이 가족과 스위스 땅에 영구 정착하는 건 막겠다는 거다. ‘스위스역사백과사전’은 ‘계절근로자(Saisonniers)’ 항목에 이렇게 쓰고 있다. “노동 시장의 수요에 유연하게 맞출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외국인 인구 과밀’을 막으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

 

계절근로자로 스위스에 가장 많이 들어온 건 이탈리아인이었다. 1950년대에 14만 명이던 이탈리아 계절근로자가 1970년대에는 60만 명까지 늘어났다. 스위스 경제 발전에 단단히 한몫했음에도 이들은 혐오 대상이었다. 한국의 3D 업종 외국인 근로자 처우를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9개월간 일하다 돌아가야 했으므로 제대로 된 집이 아니라 임시변통 막사에서 지내야 했지만, 이런 열악한 환경은 부모가 아이들과 함께 살 수 없다는 점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다. 아이들을 조부모에게 맡기고 생이별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일부는 직업을 잃을 위험을 감수하고 아이들을 스위스로 데려왔다. 이 아이들은 불법체류자였기 때문에 학교에 갈 수 없었고 아파도 병원 진료를 받을 수 없었다. 특히 1960~70년대에는 감시를 피해 집 벽장에 숨어 있거나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숲속에서 혼자 놀아야 했다는 증언이 많다. 공식 통계는 없으나 추정에 따르면 이렇게 숨어 지냈던 이탈리아 계절근로자의 아이들이 1970년대에만 약 1만5000명이었다고 한다.

 

 

외국인 근로자를 필요해서 불러다 놓고 제대로 사람대접을 하지 않았던 당시 스위스 사회 분위기는 두 건의 국민투표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첫 번째는 1970년 6월 7일 치러진 이른바 ‘슈바르첸바흐 이니셔티브’ 투표다. ‘너무 많은 외국인에 대항하는 국민 행동’이라는 이름의 극우 단체가 제안한 것으로, 스위스 각 칸톤의 외국인 비율을 10%로 제한하자는 내용이었다. 단체를 창립하고 투표를 주도한 정치인의 이름이 슈바르첸바흐였다. 캠페인 기간에 외국인들이 느낀 두려움은 상상 이상이었다. 이탈리아인 기자 콘체토 베키오가 당시 상황을 쓴 저서 『그들을 내쫓아(Cacciateli)』에 따르면, 부모가 아이들을 꾸중할 때 “말 안 들으면 슈바르첸바흐가 잡으러 올 거야!”라고 겁을 줄 정도였다고 한다. 투표 결과 54%의 반대로 이 안건은 기각되었으나, 다르게 말하면 46%의 스위스 국민이 외국인 제한에 찬성했다는 의미다(참고로 당시 투표자는 전원 남성이었다. 스위스에서 여성이 투표권을 얻은 건 1971년이다). 외국인 혐오 분위기는 한동안 계속됐다. 1971년에는 취리히에서 한 남성이 이탈리아인이라는 이유로 극단주의 단체에 의해 살해되는 일도 있었다.

 

1970년대 말 스위스 내부에서 자성하는 목소리가 나왔고 그것은 ‘다함께운동(Mitenand-Bewegung)’으로 발전했다. 외국인 근로자를 노동력이 아니라 인간으로 대우하자, 동화(assimilation)가 아니라 통합(integration) 정책을 만들자는 요구였다. 다함께 운동 실무그룹은 외국인 관련 두 번째 국민투표를 제안한다. 외국인 근로자에게 스위스인과 같은 사회 안전망을 제공하고 차별의 여지가 많은 계절근로제도를 폐지하자는 내용이었다. 1981년 4월 5일에 실시된 이 투표 결과 반대가 84%나 나왔다. 다함께운동의 압도적 실패였다. 계절근로자 제도는 2002년 스위스가 유럽연합(EU)과 자유이동협약을 맺고 나서야 폐지됐다.

 

작년 계절근로자 아이들 피해 보상 촉구

 

스위스의 다함께운동은 1950년대 미국의 흑인 민권 운동에 비견될 만한 것이었지만, 실패한 운동을 기억하는 스위스인들은 많지 않다. 기억에서 지웠다고 차별의 역사가 사라진 건 아니다. 지난해 10월 취리히에서 ‘테소로협회’가 발족했다. ‘벽장 안에 숨어 살아야 했던 계절근로자의 아이들’에 대한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단체다. 이들은 스위스 당국의 공식 사과 그리고 상징적 금액이라도 보상할 것을 주장한다. 계절근로제도가 만들어진 지 80년 만에 스위스 정부는 들추고 싶지 않은 어두운 역사를 직시하게 됐다.

 

지금도 일부 스위스인들은 ‘조건을 알고도 일자리를 얻으려 자발적으로 스위스에 온 것’이라며 계절근로제도가 차별이 아니라고 한다. ‘동남아 씨터들은 훨씬 적은 월급도 감지덕지하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라는 인터넷 댓글과 같은 논리다. 그러나 개인의 삶을 규정하는 수많은 정치적, 경제적 조건 속에서 ‘자발적 선택’이라는 건 허상이 아닌가. 우리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나이든 조부모로 이어진 돌봄 노동의 사슬을 외국인 노동자로 확장하는 중이다. 그것이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한국인과 같은 노동 조건을 보장해야 한다. 앞으로 한국은 가사도우미뿐 아니라 수많은 영역에서 외국인 근로자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스위스가 80년 전에 저지른 오류를 답습하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중앙SUN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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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노동자 차별, 스위스 어두운 그림자 남일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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