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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2.01.01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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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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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노벨 화학상 공동 수상자인 독일의 벤자민 리스트

 

 

 

 

오랜 역사와 문화를 가진 아름다운 중세 도시 독일 하이델베르크는 내가 SAP와 일하느라 수없이 방문했던 제2의 고향이다. 인구 16만의 하이델베르크는 웬만한 거리는 걸어서 다닐 수 있는 대학도시다.

 

‘1386년 이후 미래로 (ZUKUNFT SEIT 1386)’는 635년 전 설립된 하이델베르크대학 로고에 들어 있는 슬로건이다. 파리대학의 모델을 따라 신학, 법학, 의학, 철학 4개의 학부로 시작했다. 파리와 프라하대학의 교수들이 옮겨 왔다. 네덜란드 출신 초대 총장이 정한 라틴어 모토 ‘Semper Apertus(언제나 열려 있는)’는 이 대학이 추구하는 개방적 학풍을 말해 준다.

 

독일연구재단, 3년마다 대학 보고서 내

 

 

미래를 지향하면서 언제나 누구에게나 어떤 문제에도 열려 있는 개방성, 오랜 기간 정부의 획일적 통제에 길들여진 한국 대학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아닌 줄 알면서도 관성에 의해 궤도를 달리고 있는 우리 대학은 아직 실패에서 제대로 회복해 본 역사의 경험이 없다. 중세부터 몇 차례 위기를 극복한 하이델베르크대학은 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나치주의에서 빠르게 벗어나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났다. 연합군이 이 역사적 도시에 폭격을 하지 않은 덕을 봤다.

 

1945년 미군이 점령한 하이델베르크에 13인의 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유대인 부인 때문에 교수직을 박탈당했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와 나치에 저항했던 지리경제학자 알프레드 베버가 포함된 이 위원회는 ‘진리와 정의, 인류애의 생동하는 정신(Living Spirit)’을 대학의 기본 가치로 복원했다. 알프레드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으로 유명한 막스 베버의 동생이다. 야스퍼스가 이때 대학을 복원하기 위한 그의 생각을 정리해 출간한 『대학의 이념』은 지금 읽어 봐도 진리로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다. 대학은 열린 생각으로 전체를 보며 새로운 지식을 추구하는 학자들과 학생들의 열린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

 

 

 

현재의 하이델베르크대학은 12개의 학부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 있던 4개의 학부에 현대 언어, 경제 및 사회과학, 행동 및 문화과학, 수학 및 컴퓨터과학, 화학 및 지구과학, 물리천문과학, 생명과학이 추가되고 만하임에 의학부가 신설됐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네카르강 남쪽의 구도심 캠퍼스에는 1905년에 지어진 대학 도서관과 인문 분야의 학부들이 위치해 있다. 르네상스 스타일의 고색창연한 하이델베르크 성이 배경이다. 강과 구도심을 연결하는 골목길에 있는 브라우하우스(Brau Haus)를 지날 때면 뮤지컬 ‘황태자의 첫사랑’의 드링크 송이 들리는 것 같다. 경제 및 사회과학부는 인접한 강변의 베르크하임 캠퍼스에 있다. 외국 유학생이 많아 영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된다.

 

 

옛 캠퍼스에서 좀 떨어진 강북의 노이엔하이머 펠트 지역에는 자연과학과, 의학, 대학 병원, 연구소들을 위한 새로운 캠퍼스가 세워졌다. 150㏊ 대지의 중앙에 대학의 코어 기능을 배치하고 그 주변에 외부와 협력하기 위한 병원, 연구소들을 배치했다. 마치 세포의 핵을 세포막이 둘러싸는 듯한 형상이다. 독일 대학 캠퍼스로는 매우 큰 편이다. 자전거로 다닐 수 있도록 친환경 캠퍼스로 설계했다. 기숙사, 체육시설, 식물원도 있다.

 

연방제 국가인 독일의 대학은 주정부가 대학 운영의 기본 예산을 지원하고 연방정부가 연방교육연구부 산하의 독일연구재단(DFG) 등을 통해 연구비 등을 지원한다. 지역 대학이 좋아지면 새로운 지식과 아이디어의 흐름이 활발해지고 지역의 경쟁력이 높아지기 때문에 독일의 주들은 대학의 수월성을 높이기 위해 경쟁한다. 하이델베르크대학의 경우 2020년 8억200만 유로(1조 787억원) 예산 중 64.3%인 5억1600만 유로를 바덴 뷔르템베르크주에서 지원했다. 카를스루에 공대(KIT), 슈투트가르트대학, 만하임대학도 이 주에 속한 대학들이다.

 

독일 전체로 보면 2019년 기준으로 주정부와 연방정부가 각각 237억 유로(31조9000억원)와 87억 유로(11조7000억원)를 대학에 지원했다. 국립연구소를 통한 간접지원을 제외하고 독일 정부가 총 43조6000원을 대학에 직접 지원한 것이다. 고등교육투자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하위권에 속하는 우리나라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

 

독일에선 국립 연구소들이 대학에 포진해 있고 대학교수들이 소장을 맡는다. 하이델베르크 노이엔하이머 펠트 캠퍼스에는 독일 국립 암연구센터(DKFZ)가 들어와 있다. 연방정부와 바덴 뷔르템베르크주가 9대 1의 비율로 투자하는 이 국립 연구소의 2019년 예산은 3억2000만 유로(4300억원)다. 대학의 예산에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DKFZ 예산이 대학과 병원에 상당한 기여를 한다. 이외에도 의학, 천문 등 다양한 영역에서 기초연구를 지원하는 막스 플랑크 연구소가 이 캠퍼스에 위치해 있다.

 

DFG는 3년마다 독일 대학 연구비 분석 보고서를 낸다. 올해 10월의 보고서에 의하면 하이델베르크는 DFG 연구비를 가장 많이 받는 상위 세 대학에 속한다. DFG 보고서에 의하면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뮌헨대학(LMU)과 뮌헨공대(TUM), 하이델베르크대학은 2017년부터 3년 동안 4500억~5000억원을 받았다. 학생 1인당 연구비는 하이델베르크가 가장 많다. 아헨공대와 드레스덴공대(TUD)가 그 다음이다.

 

 

독일 통일 후 30년이 지난 현재 동독과 서독 지역의 총 DFG 연구비는 인구 대비로 같아지게 됐다. 이 과정에서 동독의 드레스덴공대가 가장 빠르게 발전했다. 작센 왕조의 수도 드레스덴은 1945년 연합군의 융단 폭격으로 도시의 90%가 파괴됐다. 통독 후 독일은 자존심을 걸고 이 문화의 중심지를 복원했다. 2016년 나는 드레스덴공대 컴퓨터과학부의 연례 컨퍼런스에 키노트 연사로 초청받아 강연했다. 이 행사 전에는 연방 빅데이터 연구센터 보고회에 초청받아 참석했다.

 

드레스덴은 유럽에서 유일하게 반도체 산업이 살아 있는 전략 도시다. 한때 AMD가 보유했던 글로벌 파운드리 반도체 라인이 있다. 드레스덴공대는 일찍이 기술 창업의 요람으로 자리 잡았다.

 

 

게하르트 페트바이스 교수는 와이파이 칩셋을 유럽에서 처음 개발해 창업한 교수다. 창업이 흔하지 않았던 독일에서 그는 롤 모델이 됐다. 드레스덴공대의 진취성은 최근 범대학 차원의 데이터사이언스 교육을 위한 ‘디지털 학습’ 조직을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드레스덴공대의 도서관은 지하에 만들었다. 지하 1층에는 비발디의 사계 악보 원본이 보존되어 있다. 지하 3층의 열람실에는 외부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학습과 사색을 위한 공간이다. 이 도서관은 대학 캠퍼스에 있지만 시정부가 운영 자금을 지원한다.

 

DFG 연구비 지원을 분야별로 나눠 보면 의학은 LMU와 하이델베르크, 프라이부르크대학이 앞서고 자연과학은 하이델베르크, TUM, KIT, 마인츠대학이 선두 그룹이다. 공학은 아헨공대와 슈투트가르트대학, 드레스덴공대 등이 선두다. 인문 사회과학은 자유베를린대학과 LMU가 앞선다.

 

획일적 대학 규제 한국 정부 교훈 삼아야

 

독일인은 창업보다는 기업 취업을 선호해 왔다. 그러나 이 문화도 바뀌고 있다. 베를린, 함부르크, 카를스루에, 슈투트가르트, 뭔헨 등에서 창업이 늘어나고 대학 창업에 성공한 교수와 학생들이 늘어나면서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TUM 학생들이 창업한 셀로니스는 올해 100억 유로 가치의 데카콘이 됐다. 이 학생들을 가르쳤던 알폰스 켐퍼 교수는 내가 SAP와 HANA 플랫폼을 만드는 것을 보고 유사한 기술을 개발해 나스닥 상장회사 타블로에 매각했다. 이러한 사례를 바탕으로 TUM은 ‘창업 대학’을 표방한다. 뮌헨의 두 명문 LMU와 TUM은 공동으로 디지털 기술 및 경영 센터(CDTM)를 만들어 지역 창업생태계를 키워 가고 있다. 대학은 새로운 아이디어와 지식의 흐름을 만들고 새로운 인재의 양성을 통해 사회를 미래로 이끄는 오픈 플랫폼이다. 이 플랫폼이 작동하려면 사람과 자본의 흐름이 다양하고 자유로워야 한다. 정부가 대학을 하나의 획일적 틀로 규제하는 패러다임은 미래가 없다. 투자에서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차상균 서울대 데이터사이언스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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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대학은 오픈 플랫폼, 연구비가 ‘창업 요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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